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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종 (양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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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종은 양 무제의 아들로, 예장군왕을 거쳐 지방 자사를 지냈다. 그는 북위 정벌 중 북위로 망명하여 이름을 소찬으로 바꾸고 북제의 종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북위로부터 높은 지위를 받았다. 이후 조낙주의 반란으로 쫓겨나 방랑하다가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양나라로 돌아와 무제의 아들로서 장례되었다. 소종은 출생에 대한 의혹과 방탕한 행적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양나라를 배반하여 시호를 받지 못했다.

2. 생애

소종은 502년에 양 무제와 숙원 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예장군왕(豫章郡王)으로 봉해졌으며 지방의 자사를 겸임했다. 소종의 어머니 오숙원은 남제 동혼후의 후궁 출신으로, 소종이 동혼후의 아들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소종은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지만, 방탕한 행실과 형벌 남용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무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에 괴로워하며 동혼후의 묘를 파헤치는 등 반감을 키웠다.

525년 북위로 망명한 후, 소종은 이름을 소찬(蕭贊)으로 바꾸고 북위에서 벼슬을 했다. 530년 북위가 혼란에 빠지자 소찬은 제주에서 쫓겨나 사문(沙門)이 되었다가 531년 양평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숭산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양나라로 돌아와 아들의 예로 장례되었다.

2. 1. 출생과 의혹

502년 양 무제와 숙원 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예장군왕(豫章郡王)으로 봉해졌다.

소종의 어머니 오숙원은 원래 남제 동혼후의 후궁 중 한 명이었는데, 무제가 동혼후를 죽이고 화제를 세웠을 때 오씨를 받아들여 즉위 후 숙원으로 삼았다. 그런데 오숙원은 중흥 원년(501년) 12월에 소연이 건강을 점령했을 때 무제에게 거두어졌고, 이듬해 7월에 소종을 낳았기 때문에 소종이 사실은 동혼후의 아들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결국 소종은 525년 북위로 망명하였다.

2. 2. 양나라에서의 삶과 방탕한 행적

소종은 성장하면서 학문에 뛰어났고 문장을 잘 지었지만, 자주 말을 몰고 밤에 멀리 나가거나 사람들 앞에서 반나체로 농담을 하는 등 행실이 좋지 않았다. 서주에 있을 때에는 형벌을 남용하여 다스렸다. 무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신경 써서, 곡아에 있는 제 명제의 능에 참배하거나, 동혼후의 묘를 파헤쳐 사실을 확인하려 하는 등 무제에 대한 반감을 키워갔다.

2. 3. 북위로의 망명

525년 소종은 양나라 무제의 명령을 받고 북위를 정벌하러 갔는데, 국경 지대에 있는 성을 지키다가 밤중에 틈을 타서 수행원 몇 명만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와 북위로 망명하였다. 다음날 성에서는 소종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서둘러 그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고, 마침내 성은 북위의 군사들에게 함락됐다. 소종은 성명을 소찬(蕭贊)으로 바꿨고 북제의 종묘와 동혼후에게 직접 제사를 지냈다. 북위는 소찬을 양평군공(陽平郡公)과 단양왕(丹陽王)으로 봉하고 사공(司空)과 제주자사(齊州刺史)로 삼았으며, 수양장공주(壽陽長公主)를 소찬에게 시집보냈다. 양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놀랐고 무제는 소찬을 속적에서 끊은 뒤 이어서 소찬과 그의 아들인 소직(蕭直)의 성씨를 패씨(悖氏)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모든 조치를 다시 회복시키고 소직을 영신현후(永新縣侯)로 봉했다.

보통 5년 남조 제의 건안왕 소보인이 북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북위에 보내 "숙부"라고 불렀다. 보통 6년 북위의 서주자사인 원법승이 팽성에서 양에 항복하자, 무제는 소종에게 도독으로 제 군을 통솔하게 하고, 팽성에 주둔시켰다. 이때 북위의 군과 대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무제는 병사들의 피로를 걱정하여, 소종에게 군을 물릴 것을 명령했다. 소종은 강남으로 돌아가면, 소보인을 만날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야간에 수 기로 도주하여, 북위의 안풍왕 원연명에게 달려갔다. 그해 가을에 낙양에 들어갔지만, 소보인은 관중에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고, 사자를 보내 그 얼굴과 모습을 물을 뿐이었다. 소종은 북위 조정의 예우를 받아, 사공에 임명되었고, 고평군 개국공·단양왕에 봉해졌다. 이름을 찬으로 고치고, 자를 덕문이라고 했다.

북위 효창 3년 소보인이 장안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소찬은 연좌를 두려워하여, 백록산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하교에서 붙잡혔다. 그러나 반란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벌은 받지 않았다. 건의 원년 이주영을 따라 진양으로 가서, 효장제에게 소환되어 낙양으로 돌아갔다. 영안 2년 10월, 사도로 전임되었다. 11월, 태위가 되었다. 이때, 효장제의 누이인 수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2. 4. 북위에서의 죽음과 양나라로의 귀환

525년 소종은 양나라 무제의 명을 받아 북위를 정벌하러 갔으나, 국경 지대에 있는 성을 지키다가 밤중에 수행원 몇 명만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와 북위로 망명하였다. 소종은 자신이 남제 동혼후의 아들이라는 의심을 오랫동안 받아왔으며,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머니 숙원 오씨도 눈물을 흘리며 소종에게 도망가라고 권하였다.

망명 후, 소종은 성명을 소찬(蕭贊)으로 바꾸고 북제의 종묘와 동혼후에게 직접 제사를 지냈다. 북위는 소찬을 양평군공(陽平郡公)과 단양왕(丹陽王)으로 봉하고 사공(司空)과 제주자사(齊州刺史)로 삼았으며, 수양장공주(壽陽長公主)를 소찬에게 시집보냈다. 양나라 조정에서는 소찬을 속적에서 끊고 소찬과 그의 아들 소직(蕭直)의 성씨를 패씨(悖氏)로 바꿨으나, 곧 모든 조치를 회복시키고 소직을 영신현후(永新縣侯)로 봉했다.

530년 북위가 혼란에 빠졌을 때, 제주 사람 조낙주(趙洛周)가 반란을 일으켜 소찬을 쫓아내고 성을 점거했다. 소찬은 출가하여 사문(沙門)으로 변장해서 떠돌아다니다가 장백산(長白山)에 머물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평(陽平)에서 병사했다. 수양장공주도 이주세륭에게 피살되어, 북위 조정은 두 사람을 숭산(嵩山)에 합장했다. 이후 어떤 사람이 소찬의 영구를 훔쳐 양나라로 왔고, 무제는 아들의 예로 장례를 치렀으나, 양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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